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군자 체포 사건 (문단 편집) == 결과 == 다음날인 12월 10일, 장제스는 장쉐량을 화청지로 불러 장쉐량이 제멋대로 쌍방을 대표한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호되게 질책했다. 12월 11일, 장제스는 양후청과 장쉐량에게 6차 초공작전을 실시할 것임을 통보했다. 결국 장쉐량과 양후청은 장제스를 무력으로 억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여기고 12월 12일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그날 오후 8개 요구사항을 발표했는데 그중 3항이 7군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서안 사건이 평화적으로 해결된 이후 정식으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7군자는 1937년 2월 15일 중국 국민당 5기 3중전회가 개최된 이후, 1937년 6월 11일 쑤저우 고등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7월 31일 7군자는 정식으로 석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